청주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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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청주 정씨(淸州 鄭氏) | |
관향 | |
시조 | 정극경(鄭克卿) |
집성촌 | |
인구(2015년) | 46,419명 |
1. 개요 [편집]
오늘날 현존하는 정씨의 본관은 30여본 정도이다. 우리나라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의 6촌중 하나인 진지촌(珍支村) 촌장인 지백호(智伯虎)이다.
정씨의 각 본관별 시조들은 모두 지백호의 원손(遠孫)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 혈연적 계보는 상고할 수 없다. 어쨌든 정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혈손으로 그중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종통(宗統)이라는 데에는 별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이같이 정씨는 신라 9성중의 하나로 역사적으로 명벌의 지위를 누려 왔으며, 특히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청주 정씨(淸州鄭氏)를 비롯해 동래 정씨(東萊鄭氏)[1]·연일 정씨(延日鄭氏)[2]·온양 정씨(溫陽鄭氏)·진주 정씨(晋州鄭氏)·봉화 정씨(奉化鄭氏)[3]·하동 정씨(河東鄭氏) 등이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청주정씨는 조선조에서 상신(相臣)[4] 2명, 청백리 4명, 공신 5명, 문과급제자 19명을 배출했다. 청주정씨 재실은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씨의 각 본관별 시조들은 모두 지백호의 원손(遠孫)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 혈연적 계보는 상고할 수 없다. 어쨌든 정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혈손으로 그중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종통(宗統)이라는 데에는 별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이같이 정씨는 신라 9성중의 하나로 역사적으로 명벌의 지위를 누려 왔으며, 특히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청주 정씨(淸州鄭氏)를 비롯해 동래 정씨(東萊鄭氏)[1]·연일 정씨(延日鄭氏)[2]·온양 정씨(溫陽鄭氏)·진주 정씨(晋州鄭氏)·봉화 정씨(奉化鄭氏)[3]·하동 정씨(河東鄭氏) 등이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청주정씨는 조선조에서 상신(相臣)[4] 2명, 청백리 4명, 공신 5명, 문과급제자 19명을 배출했다. 청주정씨 재실은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지정되어 있다.
2. 계보와 시조 및 역사 [편집]
청주 정씨(淸州 鄭氏)는 한국의 성씨 중 하나로서 시조는 같으나 서로 다른 두 중시조를 이어오고 있다.
청주정씨(淸州鄭氏) 본관(本貫)인 서원(西原)은 청주(淸州)의 신라때 옛 이름이고, 정씨(鄭氏)는 신라때부터 서원경(西原景)에 살고 있던 명망있던 씨족(氏族)이었다. 그러나 이를 고증할 정연한 근거는 고려중엽 이후로부터 처음 나타나 있음으로 이에 청주정씨(淸州鄭氏)는 고려 의종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을 시조로 한다.
시조 정극경(鄭克卿)은 고려 의종 때에 2군 6위 중 흥위위 혹은 좌우위에 소속되어[5] 정7품 보승별장[6]을 지냈는데 사후에, 후손이 높은 벼슬을 하여 정5품 중랑장(中郞將)[7]으로 증직되었다.
정극경의 장남 계열 후손인 손자 고려 고종 때 3세손 대리(臺吏) 서경분사(西京分司) 겸 섭중랑장(攝中郞將) 대장군 정의(鄭顗)이 있고, 그의 아들 4세손 정현(鄭儇)은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5세손 판선공(判繕工) 정해(鄭瑎)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 정해(鄭瑎)의 장남인 정책(鄭幘)이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사(判繕工事)지내고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다. 정해(鄭瑎)는 부령 김씨(扶寧金氏) 김구(金坵)의 맏딸 및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 (唐洪系) 홍규(洪奎)의 둘째 딸과 결혼했는데, 부령김씨(또는 부안 김씨) 딸과는 자식이 없고, 남양홍씨 둘째 딸에서 정척(鄭㥽 또는 鄭幘)과 정이(鄭怡) 두 아들을 두었다.
6세손 응양군 상호군(鷹楊軍上護軍) 정책(鄭㥽 또는 鄭幘)의 장남 정오(鄭䫨)가 공민왕 때 1등공신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며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고. 차남 정포(鄭誧)가 있다.
청주정씨(淸州鄭氏) 본관(本貫)인 서원(西原)은 청주(淸州)의 신라때 옛 이름이고, 정씨(鄭氏)는 신라때부터 서원경(西原景)에 살고 있던 명망있던 씨족(氏族)이었다. 그러나 이를 고증할 정연한 근거는 고려중엽 이후로부터 처음 나타나 있음으로 이에 청주정씨(淸州鄭氏)는 고려 의종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을 시조로 한다.
시조 정극경(鄭克卿)은 고려 의종 때에 2군 6위 중 흥위위 혹은 좌우위에 소속되어[5] 정7품 보승별장[6]을 지냈는데 사후에, 후손이 높은 벼슬을 하여 정5품 중랑장(中郞將)[7]으로 증직되었다.
정극경의 장남 계열 후손인 손자 고려 고종 때 3세손 대리(臺吏) 서경분사(西京分司) 겸 섭중랑장(攝中郞將) 대장군 정의(鄭顗)이 있고, 그의 아들 4세손 정현(鄭儇)은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5세손 판선공(判繕工) 정해(鄭瑎)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 정해(鄭瑎)의 장남인 정책(鄭幘)이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사(判繕工事)지내고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다. 정해(鄭瑎)는 부령 김씨(扶寧金氏) 김구(金坵)의 맏딸 및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 (唐洪系) 홍규(洪奎)의 둘째 딸과 결혼했는데, 부령김씨(또는 부안 김씨) 딸과는 자식이 없고, 남양홍씨 둘째 딸에서 정척(鄭㥽 또는 鄭幘)과 정이(鄭怡) 두 아들을 두었다.
6세손 응양군 상호군(鷹楊軍上護軍) 정책(鄭㥽 또는 鄭幘)의 장남 정오(鄭䫨)가 공민왕 때 1등공신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며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고. 차남 정포(鄭誧)가 있다.
3. 규모와 집성촌 [편집]
2019년 기준 청주정씨는 전국 약 1만 2천여 가구, 4만여 명 정도의 규모로 추산된다. 전체 성씨 가운데에서는 150위권 정도에 속하는 규모로 비교적 적은 편에 속한다.
대표적인 집성촌은 아래와 같다.
대표적인 집성촌은 아래와 같다.
4. 설헌파 [편집]
5. 설곡파 [편집]
6. 항렬도 [편집]
25세 | ◯규(逵) | ◯락(洛) | ◯영(永) | ||
26세 | ◯흠(欽) | 주(柱)◯ | ◯화(和) | ||
27세 | 승(承)◯ | ◯섭(燮) | ◯용(容) | ||
28세 | ◯원(元) | 재(載)◯ | 재(在)◯ | ||
29세 | ◯의(義) | 사(思)◯ | ◯호(鎬) | ◯환(煥) | ◯진(鎭) |
30세 | ◯윤(潤) | ◯원(源) | ◯수(洙) | ◯순(淳) | |
31세 | 인(寅)◯ | 진(震)◯ | ◯식(植) | 수(樹)◯ | 동(棟)◯ |
32세 | 日 부수 | 心 부수 | 헌(憲)◯ | ◯창(暢) | ◯항(恒) |
33세 | 건(建)◯ | 교(敎)◯ | 박(珀)◯ | 용(墉)◯ | |
34세 | ◯발(發) | ◯회(會) | ◯록(錄) | ||
35세 | 도(道)◯ | 우(遇)◯ | 홍(洪)◯ |
7. 인물 [편집]
7.1. 근대 이전 [편집]
7.2. 근·현대 [편집]
[1] 정씨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2] 대표적 인물로 고려말기 포은 정몽주가 있다.[3] 대표적 인물로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이 있다.[4] 정승을 뜻하는 말로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이르는 말[5] 그렇게 추정된다.[6] 오늘날의 중위[7] 오늘날의 소령[8] 아프리카 TV BJ 퀸가현이 추석 때 제사를 지냈던 재실이 이곳에 있다.[9] 조선 중기의 문신 한강 정구가 이 마을 출신이다.[10] 독립유공자 정순영·정재기·정종호가 이 마을 출신이다.[11] 정양호 전 조달청장이 이 마을 출신이다.[12] 호는 약포(藥圃: 1526~1605)이며 여러 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정1품 영예직인 서원부원군에 오른 조선 중기 문신이다. 이 분은 이순신 장군이 누명으로 옥에 갇혔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한 신구차(伸救箚: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뢰는 상소문)를 올려 이순신 장군을 살려 냈고, 의병장 김덕령을 변호하고, 명나라 장수 두사충을 구명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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